2017.07.25. 화요일 ~ 2017.07.28. 금요일
이번에 횡단 열차를 타면 여유로움을 즐기고 싶었다.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 나누는 것도 좋지만 기차 안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어서 지난번에 기차 탔을 때와는 달리 먼저 사람들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근데 선뜻 먼저 말을 건네주는 사람들. 내 앞에 탔던 러시아 배낭여행자 안나, 그 옆 복도에 나란히 타고 있던 4 자매와 엄마, 그리고 2층에 있던 러시아 대학생들까지.
나는 이번 기차 여행에서 내가 얼마나 소극적인 사람인지를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다른 애들이 카드 게임 하는데 그 옆에서 가만히 앉아 책을 읽었고 노래를 들었다. 그 덕분에 날아간 정신줄 때문인지 이어폰도 잃어버렸다ㅎㅎㅎ
그냥 기차에서 많은 생각을 했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고 나의 다양한 면을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도 스스럼없이 먼저 말을 걸 수 있는 '나', 쑥스러워하며 먼저 마음의 문을 열지 않는 '나', 그냥 모든 것을 내 위주로만 생각하는 '나', 그렇게 여러 모습의 '나'를 만났다.
기차를 탔던 당시에 이번에는 그냥 이렇게 지내봐야지 하고 막연하게 생각했었다. 근데 사람과 사람이 만나면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게 되고 서로를 알아갈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기차에 탔던 4자매와 엄마는 한국을 참 좋아했다. 특히나 엄마는 올 새해에 한국으로 여행을 다녀왔고 얼마 전에 한국 친구들이 러시아에 놀러 왔다고 한다. 그리고 16살 되는 딸 다이아나는 한국 드라마와 방탄소년단을 무척이나 좋아하고 꼭 한국에 오고 싶어 했다. (근데 그거 아니 다이아나? 지금은 내가 방탄소년단을 아주 많이 좋아해...)
내가 서투르게 가르쳐 주었던 한국어 인사말과 단어들을 따라 적으며 무척이나 좋아했다. 그게 기차에서의 마지막 날 밤이었다. 사실 아침, 저녁으로 잠깐씩 한국이나 드라마 내 여행에 대해 얘기하는 시간들이 있었다. 근데 생각해보니 내가 딱 거기까지만 다가갔다. 더 많이 이야기 나눌 걸 사진이라도 찍을 걸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번 기차 여행에서는 내가 먼저 달무티를 하자고 카드를 꺼내지도 않았고 나서서 대화를 시도하지도 않았다. 사람 마음이란 게 참 간사하다. 내가 선택해서 나만의 시간을 보내기로 했는데 마지막 날이 돼서야 괜히 주변 사람들에게 미안해졌다. 이번 기차 여행에서는 한국사람을 만날 수 없었다. 그런데 한국을 한국 문화와 드라마를 좋아해 주는 러시아 사람들을 만났다.
평소 같았으면 나서서 이것저것 더 보여주고 얘기하려고 했을 텐데 나도 참 못됐다. 아직 여행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사람에 치이고 있다고 생각했나 보다. 나는 기차에서 '슬램덩크'를 읽고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읽었으며 일기를 쓰고 노래를 들었다. 그게 다였다. 왜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기 어려워했을까. 기차에 타기 전부터 이번에는 기차에서 쉬어야지. 그렇게 생각해서 그런지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한 것 같다.
근데 그렇게 마지막 날에 이런 얘기 저런 얘기하며 즐거워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니 내가 참 못난 사람이더라. 원래도 못났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더 잘 알게 됐다. 외국에서도 못난 나를 벗어던질 수는 없었다. 사람의 본성은 그리 쉽게 변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 의식의 흐름대로 글을 쓰고 있는데 나도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나중에 보고 오글오글해서 이불 뒤집어쓰고 있겠지.
그건 그렇고 4일 동안 기차에서 잤는데 이번에는 머리 감는 데 성공했다. 봉지 라면 먹으려고 샀던 밥통을 바가지처럼 이용해서 머리를 감았다. 역시나 안 감는 것보다는 훨씬 낫더라. 4일 동안 머리를 안 감을 자신은 없었기에 도전했는 데 성공해서 다행이었다.
이번에도 기차에서 만난 사람들 다 좋았고 별문제 없이 모스크바에 잘 도착했다. 근데 그 기차에서 내가 제일 솔직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오늘 새벽 모스크바에 도착해 내리기 전에 내 대각선 방향 복도 쪽에 있던 할머니가 밝게 웃으며 잘 가라고 인사해주셨다. 사실 얼굴을 오며 가며 봤었는데 매번 인사를 하거나 대화를 하던 사이는 아니었다. 근데 할머니가 그렇게 밝게 인사를 해주시니 뭔가 울컥했다. 나는 왜 이렇게 못났는지 에휴, 아직 한참 멀었다.
내가 제대로 못 먹는 것 같았는지 이것저것 먹을 거 많이 챙겨줬던 러시아 엄마, 그리고 친구들. 진짜 너무 고맙다ㅠㅠ
오늘 아침에 같이 사진도 찍었는데 뭔가 더 미안해짐.. 역시 나 전생에 착하게 살았던 게 분명한 듯. 그게 아니고서야 매번 이렇게 좋은 사람들만 만날 수가 없지 ㅠㅠ
4자매 가족들은 모스크바에 있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만나러 간다고 했다. 다이아나는 자기가 태어난 후 크고 나서는 처음으로 할머니, 할아버지를 보러 간다고 했다. 이런저런 사정이 있었겠지만 그렇게 즐거워하는 가족들을 보니 내 기분이 다 좋아졌다. 그리고 모스크바에 도착하기 전날 저녁, 혹시나 모스크바에 내가 묵을 숙소가 없을까 봐 물어봐주시고 혹시나 문제 있으면 언제든 도와줄 테니 연락하라고 러시아 엄마가 그렇게 말해 주셨다. 겉으로는 안 울었는데 마음속으로는 아주 엉엉 울었다ㅠㅠ
그때 나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다. 나는 기차에서 사람들에게 진심을 다 하지 않았는데 이 사람들은 나를 진심으로 따뜻하게 대해줬구나. 아직 미성숙한 인간은 이렇게 배웁니다.
즐거운 기차여행기는 아니지만 이런, 저런 일들을 겪으며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생각할 기회를 얻었다.
주가 다시 시베리아횡단열차를 타겠냐고 물으면 나는 주저 없이 네!라고 대답하겠다. 다음에는 겨울에 새 하얀 눈 밭을 지나 달리는 기차에 몸을 싣고 싶다.
못난 나를 한 껏 껴안아 주었던 러시아 사람들, 누가 러시아를 무서운 나라라고 했던가. 누구보다 친절하고 열린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내 기차 여행은 힘들지 않았다.
※ 이 여행 일기는 2017-2018년 배낭여행을 하던 당시 실시간으로 네이버 블로그에 올렸던 글을 다시 포스팅하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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